라떼군 이야기


나의 하루는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

견적서 맨 아래 한 줄

개발자로 20년 넘게 일하면서 견적서를 정말 많이 썼다. 몇 장을 썼는지는 세어보지 않았는데, 세어봤다가 그 시간이 아까워질 정도이다. 견적서는 항목을 아무리 길게 늘어놔도 결국 맨 아래 한 줄로 수렴한다. 하루에 얼마.

회사 다니는 사람은 이 숫자를 직접 적을 일이 없을 뿐이지, 월급을 근무일수로 나누면 똑같은 숫자가 나온다. 누구나 자기 하루에 가격표 하나씩은 달고 산다. 다만 프리랜서는 그 가격표를 매번 자기 손으로 써야 해서 좀 더 자주 찜찜해질 뿐이다.

찜찜한 이유는 하나다. 이게 정말 내 하루 값일까. 아침에 눈 뜨고 밤에 잠들 때까지의 이 하루가, 정말 저 숫자만큼일까.

그래서 나한테 견적서를 써봤다

궁금하면 해보는 게 개발자의 습관이라, 어느 날 저녁에 진짜로 써봤다. 클라이언트한테 보내는 양식 그대로, 수신자만 나로 바꿔서 말이다.

항목시간단가비고
클라이언트 A 코드 리뷰4h명확함청구 예정
클라이언트 B 버그 추적3h명확함원인만 찾음, 못 고침
샤워하다 떠오른 아이디어0.2h?아직 값 없음
내 서비스 기능 하나 추가2h?수입 0원
친구랑 커피2h?청구 불가
아무것도 안 함1.5h?비고 없음

하지만 쓰다가 알았다. 단가가 적히는 항목은 남한테 빌려준 시간뿐이고, 정작 내 하루에서 내 것인 항목은 전부 물음표라는 걸. 결국 오랜 시간 견적서를 쓴 사람이 자기 하루 견적서는 절반도 못 채운 것이다.

일당은 가치가 아니라 임대료다

그 물음표를 보다가 깨달은 게 있다. 견적서 맨 아래 숫자는 내 하루의 값어치가 아니었다. 내 하루를 남에게 빌려줄 때 받는 값어치이다. 시장은 내 하루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하루 동안 내가 뽑아낼 결과물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니 일당은 가치보다 임대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집주인이 받는 월세가 그 집에서 산 사람의 인생 값이 아니듯이.

월세와 집값을 헷갈리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시장이 싸게 부를 때는 내 하루까지 싸구려처럼 느껴지고, 시장이 비싸게 불러줄 때는 그게 진짜 내 값인 줄 착각한다. 나는 둘 다 경험해 봤다. 이 중에 두 번째가 더 위험하다. 첫 번째는 기분만 나쁘고 끝나는데, 두 번째는 임대료 좋을 때 집을 안 고치고 게을러진다.

시급으로 살면 생기는 일

문제는 이 숫자가 한번 머릿속에 자리 잡으면 모든 걸 그 단위로 환산하게 된다는 점이다. 일당을 8로 나누면 시급이 나온다. 그때부터 드라마 한 편이 얼마짜리인지, 친구랑 커피 마시는 두 시간이 얼마짜리인지 계산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이 계산은 끝까지 밀고 가면 자기 자신을 웃음거리로 만들게 된다. 이 글을 쓰는 데 세 시간쯤 걸렸으니 이 글은 내 시급 곱하기 3짜리 글이고, 지금 이걸 읽고 있는 당신도 당신 시급으로 몇 분어치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이 문장에서 멈추는 게 경제적으로 합리적이다. 그런데 안 멈추고 계속 읽을 거라는 걸 안다. 나도 안 멈출 거니까.

계산의 함정은 답이 늘 똑같다는 데 있다. 뭘 하든 “그 시간에 일했으면 얼마인데"로 끝난다. 그 논리대로면 가장 가치 있는 하루는 24시간 내내 일하는 하루다. 그런 하루가 좋은 하루가 아니라는 건 해본 사람은 다 안다. 계산은 맞는데 결론이 틀렸다면 단위가 틀린 것이다.

물음표 항목의 정체

견적서의 물음표 항목들을 다시 보자. 값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값이 안 붙은 것이다.

“버그 원인만 찾음, 못 고침"은 결과물만 보면 0이다. 그런데 그날이 없었으면 다음 날 수정은 안 나왔다. 코드에는 안 남았지만 머릿속에는 남아 있다. 데이터베이스에 새 행이 안 들어와도 내부 상태는 바뀐다. 사람의 하루는 대부분 이렇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는 날이 대부분이고, 그 날들이 쌓여야 결과물이 나오는 날이 있는 것이다.

“내 서비스 기능 추가, 수입 0원"은 더 극단적이다. 나는 지금까지 수많은 서비스를 직접 기획도 해보고 만들어서 운영하고 있는데, 그걸 만들던 날들은 전부 이 항목이었다. 일당으로 치면 손해 본 날들. 그런데 그중 일부는 지금도 매달 뭔가를 돌려주고, 어떤 건 몇 년치 일당을 한꺼번에 돌려주기도 했다. 그날 하루가 특별해서가 아니다. 비슷한 날이 몇 백 일쯤 쌓인 뒤에 한꺼번에 정산이 될 뿐이다.

그러니까 물음표는 “값 없음"이 아니라 “후불"로 보는 편이 좋겠다. 하루의 값은 그날 정해지지 않는다. 나중에 정해진다. 대학 때 심심해서 배운 언어가 10년 뒤에 밥벌이가 되고, 별생각 없이 만들어둔 기능이 어느 날 계약을 따온다. 오늘 하루가 얼마짜리인지 오늘 모르는 건 내가 몰라서가 아니라 아직 정산일이 안 왔기 때문이다.

다만 조건이 있다. 후불로 받으려면 오늘 뭔가를 남겨둬야 한다. 아무것도 안 남긴 하루는 나중에 청구할 게 없다. 견적서에 항목이 없으면 정산도 없다.

롤백이 없는 배포

그러면 아무 하루나 살아도 되는 걸까. 하나만 짚고 가자. 돈은 잃어도 다시 벌 수 있지만 하루는 그렇지 않다. 건강도 그렇다. 개발자 식으로 말하면 하루는 롤백이 없는 배포다. 배포 버튼 누르기 전에는 한 번 더 확인하면서, 하루는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매일 아침 새로 지급되니까 무한한 것처럼 느껴져서다. 통장 잔고는 매일 확인하면서 나의 남은 하루의 개수는 확인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겁주려는 얘기는 아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어가면서 시간에 대한 소중함을 많이 느낀다. 하루에 값이 붙는 이유가 바로 하루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무한히 찍어낼 수 있는 것에는 값이 없을 것이다. “얼마의 가치가 있을까"라는 질문은 사실 “다시 못 받을 이 하루를 오늘 뭘로 바꿨나"라는 질문이다.

임대 시간과 나만의 시간

그렇다고 시급을 잊자는 얘기는 아니다. 프리랜서에게 일당은 생존이고, 자기 시간에 값을 매길 줄 모르면 남이 헐값에 가져간다. 다만 그 숫자를 하루 전체에 갖다 대지는 말자는 것이다.

견적서를 써보고 나서 나는 하루를 두 종류의 시간으로 나눠서 본다. 하나는 임대 시간이다. 단가가 명확하게 적히는 항목들. 이 시간은 그 단가를 제대로 받는 게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나만의 시간이다. 물음표가 붙는 항목들. 내 서비스를 만들고, 글을 쓰고, 사람을 만나고,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 이 시간은 당일 결제가 안 된다. 후불이다. 그리고 인생에서 큰 것들은 대체로 후불로 들어온다.

임대 시간은 시급으로 관리하고, 나만의 시간은 시급에서 풀어주는 것. 한쪽 잣대로 다른 쪽을 재지 않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꽤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하루 끝에 커밋 메시지 한 줄

그러면 오늘 뭘 할까? 의욕 넘치게 “가치 있는 하루를 보내자"고 다짐하면 대개 실패한다. 값은 나중에 정해지니까 오늘은 알 길이 없어서다.

대신 하루 끝에 견적서에 한 줄만 추가하는 걸 권한다. 개발자들이 코드를 저장할 때 남기는 커밋 메시지처럼. 오늘 뭘 바꿨는지, 코드여도 되고 생각이어도 되고 사람이어도 좋겠다.

feat: 결제 모듈 리팩토링, 청구 예정
wip: 새 서비스 아이디어, 아직 이름도 없음
fix: 어제 친구한테 한 말 정정
chore: 하루 종일 유튜브
docs: 읽기만 함

“읽기만 함"도 적는다. 그것도 상태 변화니까. “하루 종일 유튜브"도 적는다. 안 적으면 그 하루는 없었던 게 되는데, 적어두면 최소한 한 달 뒤에 chore가 몇 개였는지는 보인다. 한 달만 쌓아보면 자기 하루가 어떤 종류의 값을 만들고 있는지 보인다. 시급으로는 절대 안 보이던 게 보인다. 나는 이걸 자동으로 모아주는 작은 도구를 하나 만들어볼 생각인데, 그전까지는 메모 앱 한 줄이면 충분하다.

솔직히 이 글은 나한테 쓰는 글이기도 하다. 20대, 30대의 나는 하루의 가치 같은 걸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일이 들어오면 했고, 마감이 있으면 밤을 샜고, 남는 시간은 흘려보냈다. 그 하루들이 어디로 갔는지 지금은 기억도 안 난다. 임대료는 꼬박꼬박 받았는데 나만의 시간은 장부에 적지 않았으니, 그 시절의 changelog는 텅 비어 있다. 릴리즈는 분명 있었는데 릴리즈 노트가 없는 것이다. 조금만 일찍 이 질문을 던졌더라면, 그때의 하루들을 조금만 더 아꼈더라면 지금 내 changelog는 꽤 달랐을 것이다. 그게 후회된다.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지금 내 하루가 얼마짜리인지 나는 아직 모른다. 몇 년 뒤에나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정산서를 받아 들었을 때 후회가 조금이라도 덜하려면, 오늘 한 줄부터다. 이제 나만의 시간의 git 로그를 남겨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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